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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6.25전쟁 제69주년 학도병의 수기 (1)


횡성뉴스 기자 / hsgnews@hanmail.net입력 : 2019년 06월 17일
↑↑ 송 영 수
학산미예연구원장(안흥면)
ⓒ 횡성뉴스
6.25 전쟁은 한민족의 최대의 비극이다. 엄청난 희생을 치른 전쟁은 아직도 휴전의 상태를 벗지 못하고, 그 환부(患部)는 여전히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6월이면 벌써 69년을 맞이한다. 

이 지구촌 마지막 둘로 나눈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에게 6.25가 점점 잊혀 진 전쟁으로 굳어지는 것은 아닐지 이 처절했던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을 반복(反復)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고 6.25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미래 조국을 지켜야할 젊은 세대는 더 깊은 경각심(警覺心)을 가져야한다. 

그래서 직접 참전하여 경험한 실화(實話)를 전하고자 한 것이다.

1950년 통영중학교 2학년(5년제)재학 중 학업을 중단하고 15세 나이에 자진 참전하였다. 당시 그 전쟁은 동족상잔으로 비극의 숱한 사연들이 얽힌 격전이었다. 이 전선에서 직접보고 몸으로 체험한 상황을 회상 해 본다. 

6.25 전쟁은 북한군이 남침하여 우리 군과 양민이 많이 숨지고 있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한강 다리를 끊고 도망치면서 방송으로 안심하라고 하던 이승만 대통령! 

순식간에 서울이 함락되고 부산을 제외한 국토의 최남단 경남 통영 읍까지 진입하였다. 1950년 8월 16일 해질 무렵 통영 원문고개를 넘어 국군과 경찰이 최후까지 항전 하였으나 결국 후퇴하고 다음날 8월 17일 새벽녘에 북한군이 통영읍으로 진입 하였다. 아군은 거제도와 한산 비진도로 후퇴하여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당시 필자는 경남 산양면으로 피난길에 잠시 보디섬 인근에서 밤을 새우는 17일 새벽이었다. 북한군들이 민간인을 앞세워 안내와 부역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다음날 오전에는 김승은 장군이 지휘하는 해병대가 빼앗긴 통영을 하루 반 만에 다시 탈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상적인 양분으로 쌍방 부여동조 여부로 우매하고 무고한 양민들만 참혹하게 희생되는 비극이 다시 연출되는 현장을 목격하였다. 생각하면 사상이라고 하는 정치적 몇몇 정객들이 연출하는 피의 역사라는 생각이 들어 소름이 끼칠 때가 있다. 

세계사를 들추어 보더라도 나라와 나라, 사상과 사상이 편가르기를 하면서 크고 작은 전쟁을 일으켜 힘없는 나라와 몽매한 사람들만 희생내지 대량 학살당하는 피의 연속이 아니던가. 당시 필자는 인간의 주요한 학습에 전념할 서론기(序論期)에 국운(國運)은 풍전등화 같은 현실이었다. 

호국(護國)과 학업의 양자 갈림길에서 번민하였다. 이 사상이라는 피의 전쟁으로 무고한 양민들의 희생이 하루속히 종지부를 찍어 이념갈등을 벗어나 참 평화를 누리고 싶었다. 

1950년 9월 19일 해군18기(해병3∼4기 해당)에 자원입대 하였다. 1개월간 특수 훈련을 받는데 이 훈련이 너무 힘들어 견디지 못해 탈영병(脫營兵)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즉시 검거되어 진해 통제부 사격장에서 많은 장병들 앞에서 총으로 사살되어 목숨을 끝내고 사라진 훈련 동기병도 있었다.

이 탈영병 사건으로 기합방식이 다양하여 견디기 힘든 기합을 받아야만 했고. 이 혹독한 기합을 모면하기 위하여 탈영을 수 차례 생각하는 갈등 속에 소정의 훈련을 마쳤다. 당시 전세가 위급한 상황이라 해군에서 해병대 자원전역에 큰 무리 없이 1950년 10월 20일 해병대 제1연대에 배속되었다. 

그 무렵 전방의 치열한 전투로 전상자는 연일 속출(續出)하여 후송됨으로 보충병이 화급(火急)한 상황이었다. 진해항에 대기하고 있던 함정에 본 소속 해병 1연대는 중무장하여 승선(乘船) 출항하여 수일 후 중동부전선 미 해병사단과 합류하였다. 

합동작전으로 북진 공세를 거듭 하던 중 좌측 중서부 육군 제6사단 방어선이 붕괴(崩壞)되었다. 이로 인하여 본 해병연대가 큰 타격에 곤욕을 치루면서 또 탈영 학도병 2명이 생겼다. 이들 역시 검거되어 항변(抗辯)할 여지도 없이 즉시 많은 장병들 앞에서 총으로 사살하였다. 

이는 탈영 예방의 경각심으로 희생양이 되었다. 한편 진격을 위하여 상사는 병사에게 척구(정찰)병의 명분으로 명(命)하여 북군이 매설한 지뢰밭을 진입하게 한다. 

이 병사는 지뢰를 밟아 폭파로 희생된다. 상사는 또 다른 병사에게 다시 명하여 진입케 하여 차례로 지뢰를 밟아 몸으로 터트려 진입로를 만드는 형국인데 동료들을 대신하여 앞서 목숨을 잃게 된다. 

이같이 쉼 없는 전투가 계속되어 피로가 쌓여 행군하면서 옷에 소변을 그냥 보게 된다. 잠시나마 따뜻하나 소변에 젖은 바지가 혹한(酷寒) 추위에 얼게 되어 이 얼게 된 바지에 부드러운 사타구니가 긁혀 피가 나는데도 계속 행군한다. 피로가 더욱 쌓여 졸면서 가다가 눈 덮인 깊은 계곡에 추락하여 생명을 잃게 된다.

특히 해병대는 특수 임무의 명(命)이 잦아 북한군과의 교전거리는 보통 100m 이내에서 형성되어 육박전을 방불케 한다. 전투 중 위급한 상황에서 병기를 전투지에 두고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생존하여 아군진지에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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