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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횡성 바로 알기 ②
풍운아의 한이 서린 슬픈 이름 ‘화전(花田)’
김승기(횡성문학회장) 기자 / 입력 : 2009년 05월 01일
 |  | | | ↑↑ 김승기 횡성문학회장 | | ⓒ 횡성신문 | 횡성의 이름 중 하나인 화전은 ‘꽃밭’ 즉 ‘꽃으로 뒤덮인 고장’으로 해석해도 좋을 아름다운 이름이다. 그런데 동국여지승람에 ‘별호 화전(別號 花田)……’ 즉 공식명칭이 아닌 별명이라고 한 것은 이름 뒤에 숨겨진 슬픈 역사 때문이다.
북쪽 변방을 지키던 한 사나이는 부모가 돌아가셨으나 형편이 어려워 고향으로 모시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겨, 스스로 죄인이라 칭하며 둔내면 영랑리 산골짜기로 숨어들었다.
당시 정국은 무력을 동원한 서인의 정변이 성공하여 인조가 즉위하였으나, 재위중인 왕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르고, 공신들이 권력을 장악한데 대한 불만으로 혼미하였다.
조정에서는 광해군 때 정치에 참여하지 않은 인재라며, 벼슬을 내리고 출사를 권했지만, 정권을 질책하며 나가지 않으니 그가 횡성에서 은둔하던 이헌 이인거(怡軒 李仁居)이다.
무능한 정치로 백성의 살림이 피폐해지자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니, 그도 대북파의 지도자 유희분과 교류하며 세를 키워 거사를 준비한 끝에 1627년 9월 28일 스스로 ‘창의중흥대장’이라 칭하며 봉기하였다,
강원감사 최현에게 조정에 올려 줄 것을 당부한 상소에서 “정묘호란에서 후금과의 화친을 주장한 세력을 숙청하고 오랑캐를 정벌하겠다”는 명분을 밝히고, 1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봉화산의 봉수대를 부순 후 횡성관아에 당도하니 놀란 횡성현감 이탁남이 원주로 도망쳐 관아를 쉽게 점령하였다.
원주목사 홍보는 변고를 조정에 알려 서울로 향하는 길목과 각도에 반군에 대비하도록 하고, 군사를 증강하여 토벌에 나서 10월 1일 그와 세 아들이 사로잡아 서울로 압송하여 저자거리에서 참형하니, 수하들도 체포되거나 뿔뿔이 흩어져 평정됨으로서 거창한 명분을 내세운 이인거의 난은 3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이후 횡성은 역적이 난 곳이라 하여 벌로 10년간 현(縣)이 철폐되어 원주목에 복속되었다가 1636년 복권되는 수난을 겪는다. 본래 이름을 부를 수 없게 된 이 기간 동안 화전이라 불렀을 것으로 보이며, 이때 봉화산 봉수대가 폐지되었다고 전해진다.
난은 실패로 막을 내려 대역죄인이 되었지만, 세상을 구하고자 했던 선각자는 아니었을까!
[주] 책사가 횡성에 있는 세추동을 모두 거쳐야 성공한다고 조언했으나, 조급한 나머지 거병지인 둔내 추동마을과 경유지인 횡성 추동만 들리고 갑천 추동리를 거치지 않아 실패하였다는 속설이 있다.
김 승 기
횡성문학회장
횡성군의회 전문위원
본지 객원 논설컬럼위원 |
김승기(횡성문학회장) 기자 /  입력 : 2009년 05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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