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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못한 영웅 한상렬 의병장
횡성뉴스 기자 / hsgnews@hanmail.net 입력 : 2010년 04월 09일
 |  | | | ↑↑ 김승기 / 청정환경사업소장 | | ⓒ 횡성신문 | 횡성군이 배출한 대표적인 의병장인 한상렬(韓相烈)은 조선왕조가 무너져가던 1876년(고종13년) 4월2일 우천면 문암리의 한동수(韓東洙)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씨 문중은 문암들의 대부분이 소유했다고 전해질 정도의 토호로 어려서부터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하였으며, 일제의 조선침략이 본격화되던 때 과거 준비에 전념하고 있었다.
일제에 의해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하고자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향리에서 거병하였다.
한상렬 부대는 초기에는 병사가 200여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막대한 재산을 군자금으로 내놓고 탁월한 지도력으로 부대를 지휘하여 명성을 얻자 왕성할 때는 1200명에 이르렀다.
경기도 지평과 홍천· 원주·평창·영월에서 무려 500여 차례 교전하여 많은 적을 사살하고 무기와 탄약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며, 1907년 10월 모고곡(毛古谷:서원면)에서 이인영·한갑복·민긍호부대 등 8000여명과 연합한 진공작전에 참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야심차게 준비한 1908년 1월 서울 진공작전에서는 크게 패하였으나, 전열을 가다듬고 심기일전한 한 의병장은 2월 홍천에서 대부대와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어 설욕을 한다.
이에 굴욕을 겪은 일제는 횡성에 주둔한 수비대로 하여금 4월 2일 홍천군 월운면 서북후동에 살던 그의 처자를 납치해 놓고 귀순하라고 온갖 회유와 협박을 자행하지만, 한의병장은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4월 20일 횡성을 급습하여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일제는 그 보복으로 문중의 땅과 모든 재산을 몰수하니 식솔은 풍비박산하고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일제는 전국에서 치열하게 전개되는 의병활동을 말살하기 위해 병력을 대거 증강하여 ‘남한대토벌작전’을 전개하니, 대부분의 의병이 패하거나 설자리를 잃고 해산하게 되자 국내의 항일투쟁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1920년 만주로 투쟁의 무대를 옮긴다.
만주로 간 그는 대한의용부대에 합류하여 참모로 활동하다 1926년 2월 대한독립단 참모장의 중책을 맡아 항일투쟁을 계속한다. 지칠 줄 모르는 구국운동을 하던 이해 9월19일 민족진영의 분열과 몰락을 가져온 주중청년총연맹 공산당원의 흉탄에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니,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의병이 되지 않았다면 본인과 후손이 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대가로 동족의 손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불행하지만 위대한 영혼은 차가운 만주벌판 어딘가에 묻힌 채 송환되지 못하고 있어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존경하던 분이 30여 년 전 하신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귓가에 들린다.
『해방이 되고 전쟁이 끝난 뒤 반미치광이가 된 여인이 밥을 구걸하러 다녔다. 일제가 빼앗은 가문 재산의 절반만 되돌려 주었어도 그처럼 혹독한 삶을 살지 않았을 텐데….』 |
횡성뉴스 기자 / hsgnews@hanmail.net  입력 : 2010년 04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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