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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66주년 6·25전쟁, 학도병의 수기 (1)


횡성뉴스 기자 / hsgnews@hanmail.net입력 : 2016년 05월 20일

↑↑ 송 영 수 / 학산미예연구원 원장
ⓒ 횡성뉴스
6.25전쟁은 한민족 최대의 비극이다. 엄청난 희생을 치른 전쟁은 아직도 휴전의 상태를 벗지 못하고, 그 환부(患部)는 여전히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6월이면 벌써 66주년을 맞이한다.

이 지구촌 마지막 둘로 나눈 분단국가(分斷國家)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믿지 않으려는 N세대들에게 6.25가 행여 점점 잊혀진 전쟁으로 굳어지는 것은 아닐지, 이 처절했던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고 6.25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미래조국을 지켜야할 젊은 세대는 더 깊은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직접 참전하여 경험한 실화를 전하고자 한 것이다.

1950년 통영중학교 제2학년(5년제) 재학 중 학업을 중단하고, 16세 나이에 자진 참전하였다. 당시 그 전쟁은 동족상잔으로 비극과 슬픈 숱한 사연들이 얽힌 격전이었다.

이 전선에서 죽음의 고비를 수 없이 넘기던 때를 직접보고 몸으로 체험한 상황을 다시 회상해본다.
6.25전쟁은 북한군의 남침으로 우리 군(軍)과 양민(良民)이 많이 숨지고 있었다. 이런 극한상황에 한강다리를 끊고 도망치며 방송으로 안심하라고 하던 이승만 대통령!

순식간에 서울이 함락되고 부산을 제외한 국토의 최남단 경남 통영읍까지 진입하였다. 1950년 8월 16일 해질 무렵 통영 원문고개를 넘어 국군과 경찰이 최후까지 항전했으나, 결국 후퇴하고 다음날 8월 17일 자정이 지나면서 북한군이 통영읍으로 진입하였다. 아군은 거제도와 비진도로 후퇴하여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당시 필자는 경남 통영 산양면으로 피난길에 잠시 보디 섬 인근에 밤을 새우는 17일 새벽이었다. 북한군들이 민간인을 앞세워 안내와 부역(附逆)을 권유받기도 하였다.

다음날 오전에는 김승은 장군이 지휘하는 해병대가 빼앗긴 통영을 하루 반 만에 다시 탈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상적(思想的)인 양분(兩分)으로 쌍방이 부역 동조 여부(與否)로 애매하게 무고한 양민들만 참혹하게 제물이 되는 비극이 다시 연출되는 현장을 목격하였다. 생각하면 사상이라고 하는 정치적 몇몇 정객들이 연출하는 피의 역사라는 생각이 들어 소름이 끼칠 때가 있다.

세계사를 들추어 보더라도 나라와 나라, 사상과 사상이 편가르기를 하면서 크고 작은 전쟁을 일으켜 몽매(蒙昧)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대량 학살당하는 피의 연속이 아니던가. 당시 필자는 인간의 주요한 학습에 전념할 서론기(序論期)에 국운은 풍전등화(風前燈火)같은 현실이었고, 호국과 학업의 양자 선택의 갈림길에서 번민하였다.

이 사상이라는 피의 전쟁으로 무고한 양민들의 희생이 하루속히 종지부를 찍어 이념갈등을 벗어나 참 평화를 누리고 싶었다.  <계속>

횡성뉴스 기자 / hsgnews@hanmail.net입력 : 2016년 0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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