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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 가는 3·1운동…그날, 우리지역 선열들의 함성

군중 1300여명이 횡성장터에 모여 “대한독립 만세∼” 외쳐
횡성뉴스 기자 / hsgnews@hanmail.net입력 : 2017년 03월 06일

지난 1일은 제98주년 3·1절이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우리지역 3·1운동가들의 삶은 한국 현대사 그 자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의 암흑한 시절에 주권 없는 국민의 설움을 벗어나고자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혹독한 수감생활을 견디다 못해 그 후유증으로 죽기도 했다.

한 여론조사 기관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대 남녀 열 명중 2명은 3·1절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20∼50대 이상 국민 3,000명에게 3.1절에 대해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는지 질문한 결과, 9.2%는 ‘어떤 날인지는 어렴풋이만 알고 있다’, 4.5%는 ‘공휴일로만 알고 있고 의의는 잘 모른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제대로 모른다’는 응답이 13.7%에 달했다.

연령별로는 남녀를 불문하고 젊은 층일수록 3·1절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는 것으로 풀이됐다. 이에 본지는 3·1절을 맞아 우리지역 3·1운동을 되새겨 본다. <편집자 주>


↑↑ 횡성의 3·1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횡성읍 읍하리 3·1공원에 건립한 3·1운동 기념비
ⓒ 횡성뉴스
▲횡성 3·1운동= 횡성 3·1운동은 강원도 3·1운동의 효시요, 진원지로서 어느 지역보다도 거센 만세시위가 있었다.

횡성군 만세운동은 천도교인이 주도했다. 횡성면 영영포리에 본부를 둔 횡성천도교의 대교구장 최종하(崔宗河)와 도훈(道訓) 이채일(李采一)·의사원(議事員) 이동구(李東求), 그리고 봉훈(奉訓) 신재근(申在根)·강만형(姜萬馨)이 대표적 주도자들이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13일 이들은 정곡면(井谷面), 현 안흥면 상안흥리 교인 장도훈(張道勳)을 서울 이동구에게 보내서 독립선언서 40매와 태극기 20매를 구입해 영영포리에서 우천(隅川)·공근(公根) 그리고 횡성면(橫城面)에 배포하고, 원주 소초면은 강만형이 담당하여 안경춘(安敬春)·김인경(金麟卿)을 통해 정곡과 갑천(甲川)·둔내면(屯內面)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첫번째 만세운동은 3월 27일 장날에 전개되었는데, 이날 전개된 독립운동은 독립선언서에서 밝힌대로 평화적 시위였다. 4월 1일에는 횡성읍 청년 윤태환(尹泰煥)과 감리교회의 정해경(鄭海景)이 가담하여 더 많은 주민을 모아, 1천300여명의 군중이 장터에서 만세를 외치고 몽둥이 아니면 장작을 들고 일본 관헌이 만들어 놓은 것, 문을 닫지 않은 상점, 군청 건물 등을 모두 파괴하였다.

시중의 공기가 심상치 않자 일본 관헌도 비상태세에 돌입하여 군청·면사무소 등의 중요 서류를 감추고 군수 심상준(沈相俊)과 면장 김석환(金錫煥)은 관리에게 비상대기령을 내렸다.
이어 2일에도 해산하지 않은 군중 200여명이 헌병분견소에 모여 독립운동의 허가 및 체포자의 반환을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3·1운동 기념비= 횡성의 3·1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3·1운동 기념비는 횡성읍 읍하리 40번지 3·1공원에 있다. 동아일보사가 창간 60주년 기념사업으로 3·1운동 기념비 횡성군협찬회와 공동으로 1972년 8월 15일에 건립했다.

기념비는 비석 1기와 횃불을 든 조각 1기로 되어 있다. 글은 이희승(李熙昇), 글씨는 서희환(徐喜煥), 조각은 김영중(金泳仲)이 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19년의 3·1만세는 한일합방에 항거하는 통분한 함성이요, 자유와 국가를 되찾으려는 비상한 절규요,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국권을 유지 계승하려는 당당한 주장이었다. 남녀노소 빈부와 귀천의 구별없이 한덩어리로 뭉쳐진 거대한 불길의 폭발이었다. 그러므로 삽시간에 삼천리(三千里) 방방곡곡에 번져 하늘이 뻘개지고 땅이 흔들릴 듯한 맹렬한 기세였다. 이러한 정당한 평화적인 궐기에 대하여 왜적의 탄압은 어떠하였던가, 잔인하고 악독한 살육과 형벌이었다. 이해 3월 27일 우리 횡성(橫城)에서는 수천 군민이 읍내 장터에 모여 장렬한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었고, 잇따라 4월 12일까지 사이에 각 면마다 독립만세를 소리높이 부르던 중 하영현(河永賢)·강달회(姜達會)·전한국(全漢國)·강승문(姜勝文) 의사는 현장에서, 강만형(姜萬馨) 의사는 옥중에서 왜적의 총칼아래 순국의 영령이 되고 말았다. 이 숭고한 3·1정신을 이어 받아 창간한 동아일보는 유서깊은 이곳에 이 기념비를 세워 그 거룩한 정신을 만대의 후손까지 길이 받들어 드높이려 한다.』

↑↑ 횡성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한 최종하 판결문
ⓒ 횡성뉴스

▲만세운동 참가자들= 최종하(횡성읍 읍상리), 윤태환(횡성읍 읍하리), 탁영재(횡성읍 읍하리), 김성수(횡성읍 읍상리), 최동수(횡성읍 읍상리), 신재근(횡성읍 영영포리), 정해경(횡성읍 내지리), 김명기(우천면 두곡리), 김진대(우천면 두곡리), 김윤배(갑천면 매일리), 친선재(안흥면 안흥리), 장도훈(안흥면 상안흥리), 김인경(안흥면 상안흥리), 안경춘(안흥면 상안흥리), 김연의(안흥면 가좌곡리), 조상렬(우천면 하산전리), 강성순(우천면 법주리), 최양옥(갑천면 추동리), 김치정(갑천면 매일리), 강달회(소초면 둔둔리), 강만형(소초면 둔둔리), 하영현(소초면 둔둔리), 추병학(소초면 교항리), 추병윤(소초면 교항리).

자료출처: 횡성군 홈페이지, 횡성군지, 독립기념관 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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