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3) 원 팔 연 전 횡성부군수
41년 공직생활, 횡성을 위해 봉사한 보람으로 남아
처음 발령 서원면, 전기가 없어 호야와 촛불로 밤 근무
동고동락한 동료공무원, 사랑해주신 군민께 늘 감사
이철영 기자 / hsgnews@hanmail.net 입력 : 2021년 0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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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팔 연 전 횡성부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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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성뉴스 |
| 전기도 안 들어오던 시절 공직에 첫발을 들여 횡성부군수로 정년퇴임하기까지 41년 동안 횡성의 변화와 발전을 지켜본 사람. 횡성의 곳곳에 스민 그의 흔적은 한 개인의 보람을 넘어 횡성의 역사를 이루는 한편의 서사가 되었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롯이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쓰일 수 있다는 것은 개인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우리 지역의 자산이기도 하다.
횡성의 아들로 태어나 횡성군정의 주역으로 역할을 다하기까지, 험난했던 과정을 공무원이라는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헤쳐가며 지역을 위해 봉사한 것을 일생의 보람으로 여기는 원팔연 전 횡성부군수.
그는 평소 일기쓰기와 메모의 습관을 유지한 탓에 오래된 횡성이야기를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외환은행 시험 낙방, 공직생활 입문으로 전화위복 하루하루 변화는 못느껴도 지나고 보면 격세지감
1968년 덕고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횡성중학교에 진학했는데 중2때 어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어머니가 7남매를 키웠다. 내가 차남인데 형제들이 3년 터울이라 애들 학교 보내는 일도 힘들었다. 다들 어려울 때이기도 했다.
횡성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취업과 대학진학을 놓고 고민이 많았다. 가정형편을 생각하면 우선 취업이 급했고, 대학은 취업 후에라도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해 담임 선생님이 추천하는 외환은행 시험을 보기로 했다.
3학년 2학기때 서울에 처음 가서 삼일빌딩에서 시험을 보았다. 시험은 잘봤다고 생각했는데 4과목 중 영어점수가 과락이라 낙방하고 말았다. 사회 첫걸음을 실패로 시작한 셈이다.
이듬해 2월에 졸업했는데 주변에서 공무원 시험을 보라는 권유가 있었다. 마침 3월에 5급 을 공무원 공채시험이 있어서 보았는데 4월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할머니께서 많이 기뻐하셨다. 그리고는 바로 1974년 5월 1일 서원면사무로로 첫 발령을 받았다. 당시 서원면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어두워지면 호야에 불 켜놓고, 기름 떨어지면 촛불에 의지해 일을 했다. 도로는 전부 비포장도로였고 버스는 아침저녁으로 한 대뿐이었다. 지금이야 문서를 다 컴퓨터로 만들지만 그때는 ‘가리방’에 철필로 쓰고 등사해서 만들던 시절이다.
마을별 담당직원이 밤에 열리는 반상회 쫓아다니느라 애먹었다. 교통편이 없어 걸어다녔다. 면소재지 가까운 마을 담당자는 그나마 나았지만 신규 직원은 주로 멀리 있는 마을을 맡았다.
면에 1대 있는 50cc 오토바이는 면장 전용이고, 자전거 1대는 농촌지도소 지도담당 전용이라 우리한테는 차례가 안와 걸어다닐 수밖에 없었다. 80년대 초까지도 그랬다. 하루하루 변화는 몰랐는데 10년, 20년 지나고보니 격세지감이다.
2015년 6월 퇴임하기까지 41년 2개월을 근무했다. 주경야독하며 상지대학교와 대학원까지 마쳤고, 공직의 마지막을 평생 살아온 횡성에서 봉사하며 마무리한 것을 자랑스럽고 뿌듯하게 생각한다.
관선군수부터 민선군수까지 시대변화 지켜봐 군수를 선거로 뽑다보니 편가르기 현상 생겨 공무원의 가치관은 ‘나’보다 우리’를 중심으로 생각해야
공무원 조직은 인사권자를 바라보고 산다. 관선시대에는 단체장을 내무부에서 직접 내정하기 때문에 공무원들이 상급기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지방자치제도 실시로 군수를 선거로 뽑게 되면서 공무원들은 군수와 군민의 눈치를 보는 것으로 가치관이 달라졌다.
횡성이 안그랬는데 민선이 되면서 편이 좀 갈리는 현상이 생긴 듯하다. 선거 특성상 편이 갈라지는 현상이 아주 없을 수는 없겠지만 가끔 너무 심한 게 문제다. 이건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다. 군수가 바뀌고 초기에는 자신의 공약을 추진하기 위해 자신의 틀에 맞는 사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러면 안된다.
예전에 공직자들의 가치관은 나보다 우리, 공동체, 군민이 우선이었다. 요즘 신세대 공무원들이 다들 열심히 하지만 예전에 비해 우리보다 자기를 우선시하는 개인주의가 팽배해 있다는 게 아쉽다. 물론 개인도 중요하지만 군민이 없으면 공무원 조직도 없다. 군민과 조직의 공통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폐기물종합처리장, 노인전문요양병원, 공설묘원 추모관 설치 과정 잊을 수 없어 갈등을 넘어서는 과정에 주민과의 소통에 충실 반대만 하던 주민들로부터 감사패 받고 눈시울 적시기도
공직생활을 오래 하다보니 힘든 일도 많이 겪었다. 학곡리 폐기물종합처리장 설치할 때 내가 환경복지과장이었다. 당시 횡성군의 모든 쓰레기는 원주 사재리 매립장으로 갔다.
언제까지 그럴 수도 없어 대책이 시급했다. 나뿐만 아니라 전임과장들도 걱정했던 부분이었다. 횡성읍 정암리, 학곡리, 서원면 금대리 세 곳을 검토하다 학곡리로 결정이 났는데 주민 반발이 워낙 심해서 착공을 못했다. 우리 부서 직원들이 동네 주민들하고 마신 술이 덤프트럭 한 대는 될 거라고 했다.
그래서 결론에 이른 조건이 지금의 장례식장을 지어서 마을사업으로 운영하게 한다는 것이다. 입지 결정 후 4년 10일만에 공사에 착수했다. 214억이 들어가는, 당시 횡성군 이래 가장 큰 공사규모였다.
입석리 노인전문요양기관이 들어설 때도 그랬다. 복지시설이라 별 어려움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주민들의 반대가 격렬했다.
주민들과 대화하다가 컨테이너 박스에 갇혀보기도 했고, 협박도 많이 받았다. 그래도 주민과의 대화를 계속해 주민들의 숙원사업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합의를 봤다.
어느 날 반대추진위원장이 주민 몇 사람과 함께 식사라도 하자고 부르기에 고민하다 갔다. 자리에 앉지도 못하게 하더니 “과장님, 죄송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하며 감사패를 주는데 눈시울이 다 젖었다. 부상으로 양말을 받고 그동안 마음고생했던 게 순식간에 다 녹아버렸다.
갑천 공설묘원 추모관도 똑같은 과정을 겪었다. 지나고보니 같이 일하던 직원들이 고생 많아서 미안했고, 잘 협조해준 군민들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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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단위 최초 도민체전 유치, 묵계리 탄약고 이전, 송호대학교 유치에 일조한 것 보람 원주공항에 횡성 이름이 들어가게 된 사연도 기억에 남아
종합민원실장에 이어 2000년에 관광경제과장으로 갔다. 조태진 군수님이 도민체전 유치에 적극적이었는데 그때까지 도민체전은 춘천, 원주, 강릉 등 일부 시 단위에서만 개최해왔다.
군 단위 최초 도민체전 유치에 도전해서 성공적으로 치렀다. TF팀을 꾸려 1년 동안 밤새가며 준비했는데, 당시 한상선 팀장, 방창량, 윤관규, 이달환이 고생 엄청했다. 2001년 6월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김진선 지사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았다.
묵계리 탄약고 이전은 고석용 군수님때 현안사업담당 조직까지 만들어서 마무리했는데 국방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그 과정에서 대체부지 후보 중 하나가 모평리여서 고민이 많았다. 잠이 안왔다.
모평리로 결정되면 모평리 전체를 걷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대외발표도 못하고 고민하던 중 용문 지평으로 결정나는 바람에 한시름 덜었다.
민선시작으로 조태진 군수가 취임할 때 초대비서실장에 발탁됐다. 공약사항으로 대학유치가 있었는데 내 담당 업무는 아니지만 송호대를 유치하는 데 일조했다.
당시 송호대 이사장이 충북 진천에 부지 일부를 사놓고 대학설립을 추진중이었는데 횡성으로 유치하는 게 과제였다. 군에서 부지 선정을 놓고 고민하던 차에 원씨 종친회 땅 5만평을 무상증여하는 데 다리를 놓았다.
원주공항은 처음에 횡성비행장으로 불렸다. 여기에 민항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횡성군이 적극 나섰는데 이름을 두고 말이 많았다.
건설교통부와 한국공항공사에서는 국제공항표시규정에 따라 원주공항으로 한다고 했지만 횡성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집단민원을 넣기로 하고 버스 3대를 동원해 건설교통부를 찾아가겠다고 했더니 그날 오후에 연락이 오기를 원주공항 횡성터미널로 한다는 것이다.
이걸 몇 년 쓰다가 외지사람들이 터미널이 뭐냐고 지적하는 여론이 생겨 괄호 안에 횡성을 넣는 걸로 바뀌게 됐다.
횡성의 유일한 주간신문 창간 12주년 축하 지역언론으로서의 역할 기대
횡성신문 창간 행사때 지역 얘기 많이 했다. 지역신문이 과연 몇 년이나 갈지 의구심도 있었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지금까지 이어온 것이 존경스럽다.
횡성신문은 농촌의 어르신들이나 주민들이 횡성소식을 가장 많이, 쉽게 접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언론을 네 편, 내 편으로 구분해서는 안되고, 언론도 정론직필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더 좋은 정보, 더 깊은 정보를 주민들한테 알려줄 책무가 있다. 횡성에서 유일한 주간신문이다. 지금보다 더 오래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공직생활 중 유난히 ‘최초’ 타이틀 많아 사무관 이후 보직 수도 가장 많은 14개
공직생활 중 최초, 처음이라는 말이 붙는 자리에 많이 갔다. 초대비서실장을 비롯해 미래정책추진단장, 녹색성장과장, 강원도교류공무원 인사교류 대상 등이 다 최초였다. 사무관 이후 맡은 보직 수도 14개나 된다.
군수권한대행도 했는데 전체 공직기간에 비하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잠시도 긴장을 못풀고 지냈다. 별일이 다 일어났다.
상대리 골말에 야간산불이 크게 났고, 우용리엔 우박이 쏟아졌고, 학곡리에선 AI가 발생했고, 안흥 소사리 신청봉 돼지농장 분뇨유출 사건이 발생하는 등 크고 굵직한 사건사고가 많았다.
그때마다 담당공무원들이 엄청 고생 많이 했는데, 생각할수록 고마운 마음이 크다. 그러면서 41년 공직생활을 무사히 마쳤다. 이번 기회에 지면을 통해서나마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한때 마라톤 풀코스 10여회 완주 이제는 걷기예찬론자로 변신
그는 공무원사회에서 꼼꼼한 원칙주의자로 소문났다.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공직에서는 더 현명한 처세라는 믿음이기도 했다. 그를 상사로 모시던 후배 공무원들은 힘들기도 했다지만 이구동성으로 덕분에 일은 잘 배웠다고 한다.
47세 나이로 마라톤에 입문해 10여 차례 풀코스를 완주한 건각이지만 지금은 나이를 생각해 걷기운동으로 건강을 관리하고 있다.
요즘도 매일 새벽 1시간 반에서 2시간 걷는다. 지금은 아예 걷기예찬론자가 되어 그로 인해 걷는 사람도 많아졌다.
횡성한우축제위원장으로 축제의 변화를 시도했고, 공직경험을 바탕으로 송호대에서 2년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가르치는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공직자는 횡성군의 주인공 역할을 해야 한다고, 횡성을 발전에도 항상 앞장서고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믿는 그는 공직자 출신이라는 이유로 퇴임 이후에도 늘 언행을 조심한다. 심지어 아내까지도. 누가 봐도 삶 자체가 그야말로 ‘FM’이다. |
이철영 기자 / hsgnews@hanmail.net  입력 : 2021년 0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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