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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에 영화배우 신성일의 마지막 영화를 횡성에서 찍겠다는 한 제작사가 횡성문화재단을 통해 2억원의 지원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나름대로 믿을 만한 사람으로부터 소개를 받고 온 제작사 대표는 장밋빛 비전을 제시하며 횡성군을 홍보하는 데 이만한 영화가 없을 것이라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시나리오의 모든 아이디어는 신성일씨 작품이었다는데 시놉시스를 보니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왕년의 명배우라지만 원로배우의 아이디어가 요즘 트렌드를 따라잡기에는 버거워보였다. 영화 시나리오도 쓰고 영화평론도 하는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한마디로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영화계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인데, 자본이 열악한 제작사들이 지자체 홍보를 미끼로 지원금을 타내는 수법이란다. 그리고 2∼3억이라고 해봐야 영화제작비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종잣돈으로 쓰이는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횡성문화재단에서는 영화제작 지원을 결정했다. 먼저 1억원을 선지급하고 나머지는 영화 제작진행을 보아가며 지원하기로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만약을 대비해 보증보험증권을 받아놓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크랭크인도 하기 전에 신성일씨가 사망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재단으로서는 선지급한 1억원을 회수해야 했는데 제작사에 그 돈이 남아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송사를 통해 받아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로 인한 시간낭비도 많았다.
지자체에서 영화제작을 지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뼈저리게 경험하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해프닝이 최근 횡성군에서 또 벌어졌다.
횡성군은 강원도 문화관광체육특보 김수래씨가 태기왕 전설을 담은 횡성 올로케이션 레트로 무협영화 ‘짬뽕비권’ 제작 지원에 횡성군이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기획감사실 홍보담당에 업무를 배정했다가 홍보업무와 연관성이 부족하다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자치행정과 행정담당에게 업무를 추진하게 했다.
횡성군을 홍보하는 대가로 제작을 지원하는 영화인데 정작 홍보부서와 연관성이 부족하다는 말도 의아했거니와, 영화의 줄거리를 보니 태기왕 전설은 온데간데 없고 횡성에서 촬영한다는 게 전부였다.
횡성군은 지난 5월 10일 의회 설명을 거쳐 18일 군청 잔디마당에서 영화 제작발표회를 가진 후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는 각종 신문과 방송을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 마치 횡성군에서 큰 건을 하나 올린 듯했다.
그러나 불과 한 달여 만에 KBS는 뉴스를 통해 이 업무협약에 도 비서실장과 특보가 개입됐다는 것을 알렸다. 알고 보니 제작사 대표가 김수래 특보의 배우자였다. 도 특보라는 공식 지위를 이용해 사사롭게 자신의 배우자 회사 일에 지원을 요청한 것이란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제작사 또한 영화제작 전문회사가 아니라 홍보대행, 인력파견이 주업인 회사였는데 업무협약 당일에 영화제작업을 사업분야에 추가할 정도로 허술했다.
횡성군 태기왕 전설을 소재로 한다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영화 시놉시스에 태기왕은 없었다. 애초에 태기왕을 염두에 두고 만든 시나리오가 아니라 횡성군의 지원을 받기 위해 억지로 끼워맞춘 형태다.
이런 어설픈 시나리오와 6개월 완성이라는 무리한 제작스케줄을 보고도 아무런 의심 없이 군민의 혈세를 지원하겠다는 발상이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하다.
뉴스가 나가기 전까지는 영화촬영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강원영상위원회에서는 우천 오원리 소재 펜션에 머물고 있는 촬영팀에게 음료차를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뉴스가 나가고 난 뒤 상황이 급변한 듯했다. 엊그제 제작사에 물어보니 촬영은 종료됐다고 하고, 군에서는 도에서 분담금 지원이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고 예산 수립을 포기했다고 한다. 한여름 밤의 꿈이었나?
횡성군에서 영화를 촬영한다고 연예인까지 동원해가며 법석을 떨고 홍보에 바쁘지 않았던가. 그럼 결과가 이렇게 된 것에 대해서도 군민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업무협약서는 일종의 계약서다. 계약서는 서로 신뢰를 바탕으로 작성하는 것인데 요란을 떨며 작성한 업무협약서가 휴짓조각이 되고 말았다.
일이 어그러지면 누군가의 책임이 따른다. 대대적으로 홍보할 때는 언제고, 일이 수포로 돌아갔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이와 유사한 업무협약을 누가 신뢰할 것인가. 횡성군수와 군의장이 나서서 기념사진 찍고 홍보한 일이다. 최소한 군민에게 잘못된 과정을 소상히 알리고 사과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다.
이번 업무협약은 예산 배정의 절차를 무시했다는 지적도 받는다. 애초 시작부터 도청의 관련부서가 아니라 비서실장, 특보라는 정무라인에서 비롯된 일이다. 당연히 절차에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도청 정무라인에 휘둘리는 횡성군수와 군의장의 초라한 모습을 보는 군민이 더 초라해졌다. 지난번 횡성군 행정사무감사에서 김은숙 의원은 군이 체결하는 각종 업무협약에 대해 실효성을 따져 물었다.
되면 좋고 안되면 말고 하는 식의 업무협약은 행정력만 낭비하는 쇼에 지나지 않는다. 군정을 책임지는 사람은 어떤 일을 추진할 때 자신의 성과를 뽐내기보다 그것이 과연 군과 군민을 위한 길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군민으로부터 잠시 건네받은 권력을 앞뒤 재지도 않고 함부로 휘두르면 그게 곧 직권남용이다. 군민은 그러라고 권력을 맡긴 게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