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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영의 횡성수설 橫城竪說 (53)

어떤 죽음
이철영 기자 / hsgnews@hanmail.net입력 : 2021년 12월 02일

↑↑ 이 철 영
편집국장
ⓒ 횡성뉴스
생명의 탄생은 언제나 축복이다. 적어도 태어날 때만큼은.
염세철학으로 보면 탄생은 곧 죽음이기도 하다. 영원한 생명은 없고, 태어나면 반드시 죽기 때문이다.

생명의 탄생은 축복이자 약속된 죽음이기도 한데, 그렇다면 죽음도 축복이 될 수 있을까. 누구나 살면서 웰빙(well-being)을 추구하지만 웰다잉(well-dying)은 그만큼 관심이 없다. 잘살고 싶은 욕구는 있으면서 잘 죽고 싶은 욕구는 왜 없는 것일까.

잘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으로서 존엄성, 가치, 품위를 잃지 않고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 웰다잉이다. 어느 날 내게도 죽음은 다가올 것이다. 나는 잘 죽을 수 있을까.

나는 알 수 없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이 평가할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일상이지만 가족의 죽음은 특별하다. 그래서 가족의 죽음과 아는 사람의 죽음은 슬픔의 무게도 다르다. 처음 죽음에 대한 기억은 다섯 살 때 보았던 할아버지의 죽음이다.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울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가족들의 모습만 기억으로 남았다.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삶과 죽음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들어왔다.

반려견 ‘도리’의 죽음
가족의 죽음 이후 진심으로 죽음 앞에 눈물이 난 것은 데리고 있던 개가 죽었을 때다.
횡성에 올 때 진돗개 머루와 다래를 데리고 왔다. 어느 날 암컷 다래가 떠돌이 발발이와 눈이 맞아 새끼 한 마리를 낳았다.

생명의 탄생은 축복인데 화가 났다. 개의 품격을 한껏 뽐내던 진돗개와 떠돌이 발바리의 조합이라니. 그래도 새롭게 태어난 생명인데 어쩌랴. 개의 도리를 다하라는 뜻으로 ‘도리’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잘 기르기로 했다.

그런데 도리는 젖을 떼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내가 집을 비운 사이 일어난 일이라 어찌된 영문인지도 몰랐다. 이미 굳어버린 도리를 땅에 묻으면서 눈물이 났다. 태어날 때 바로 기뻐해주지 못한 것이 더 미안했다.

두 번째, ‘산’의 죽음
다래는 두 번째 출산에서 새끼 여섯 마리를 낳았다. 애비는 늑대를 닮은 늠름한 진돗개 ‘얼룩이’였다. 다른 집 개를 잠시 맡아 기르다 생긴 예기치 않은 사고(?) 였다.

네 마리를 입양 보내고 두 마리를 남겼는데 ‘솔’이와 ‘산’이다. 그중 산이 8살 되던 해에 갑자기 탈이나 병원에 입원한 지 3일 만에 죽고 말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산을 묻어줄 때 옆집 아이들이 왔다. 평평하게 만든 무덤 위에 아이들이 망초꽃을 한 다발 놓아주었다.

며칠 동안 눈물이 났고, 한동안 시무룩하게 지냈다. 8년 동안 함께 했던 시간을 조각조각 떠올리며 더 잘해주지 못했던 것들을 후회했다. 진돗개가 귀 끝이 접혔다고 놀리기도 했고 그래도 귀여운 얼굴이라고 예뻐라 했다.

내가 나갔다 들어올 때는 꼬리만으로 모자라 온몸을 과격하게 흔들며 반기는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간에 들었던 정을 놓는 데 오래 걸렸다.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핑 돈다.

웰다잉이면 좋겠어
머루와 다래가 내년이면 열세 살이 된다. 사람 나이로 치면 7,80살쯤 된다니 앞으로 살 날이 많이 남지 않았다.

피부병이 생겨 병원 신세를 지기도 하고 기력도 많이 떨어진 것이 확연해서 볼 때마다 안쓰럽다. 이 녀석들도 언젠가 내 곁을 떠날 거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진돗개의 품위를 잃지 않고, 무엇보다 아프지 않기를. 그날이 오면 부디 웰다잉이면 좋겠다.

어떤 죽음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5.18광주민주화운동, 삼청교육대 등으로 암울한 한국현대사의 주인공이 됐던 전두환이 결국 사과 한마디 없이 세상을 떠났다. 함께 했던 친구 노태우가 떠난 지 29일 만이다.

노태우는 공과 논란 속에 국가장이라도 치렀지만 전두환의 죽음을 두고는 아예 그런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한다. 조문을 가네 안 가네 하는 얘기만 뉴스에 떠돌 뿐이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겸손하게 지나온 삶을 반성해볼 텐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나 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부끄러운 날이 하루도 없었을까. 살아서 부귀영화를 누린 것으로 만족한 것일까. 원망하는 사람은 많고 칭찬하는 사람은 적은데 죽음 앞에서도 사과는 죽어도 하기 싫은 것일까.

그는 스스로 삶이 웰빙이었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천수까지 누리긴 했지만 웰다잉까지는 이루지 못했다. 평생 좋은 날 다 누리고 천수까지 누리면서 끝내 사과 한마디 하지 못하고, 기어이 욕심까지 안고 떠나는 그의 죽음이 힘들어보인다.

용서받을 기회를 스스로 버렸으니 그의 빈소에는 눈물보다 원망이 더 많이 찾아갈 듯하다. 나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

이철영 기자 / hsgnews@hanmail.net입력 : 2021년 12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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