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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영의 횡성수설 橫城竪說 (59)

남이 하는 만큼 해서 남보다 나을 수 있나
횡성뉴스 기자 / hsgnews@hanmail.net입력 : 2022년 02월 22일

↑↑ 이 철 영
시인·객원논설위원
ⓒ 횡성뉴스
1984년 출판사와 인연을 맺은 뒤 20여년 책 만드는 일을 했다. 요즘은 원고를 쓰는 사람이나 책을 만드는 출판사에서 모두 컴퓨터를 이용하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출판과정은 대부분 손으로 하는 작업이었다.

컴퓨터가 막 도입되기 시작할 무렵이었고 활판시대의 쇠퇴를 예고하는 전환기였지만 그때까지는 활판인쇄가 그럭저럭 명맥을 유지할 때였다.

원고지에 손으로 쓴 원고가 들어오면 편집자들은 원고지에 교정을 봐서 조판소에 넘긴다. 조판소에서는 납으로 만든 활자를 하나하나 뽑아서 판을 짠다.

활자는 크게 제목용 고딕체와 본문용 명조체 두 종류이고 각각 굵기가 다른 2∼3종이 크기별로 있을 뿐이어서 편집자가 선택할 수 있는 서체는 한계가 있었다.

서체를 이용한 편집 디자인도 고딕체와 명조체 두 가지를 활자 크기와 굵기에 따라 선택하며 편집을 했다. 단순했지만 정갈했고, 고전적인 디자인이었다. 1372년 세계 최초 금속활자로 인쇄된 <직지심체요절>의 편집, 인쇄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활판인쇄 시절 얘기다.

본격적인 컴퓨터출판은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쯤으로 기억된다. 활판인쇄가 쇠퇴하고 오프셋(offset) 인쇄가 대세로 자리잡고, 한글서체를 개발하는 회사들이 생겨났다.

다양한 서체가 생겨나면서 편집 디자인에도 혁명이 일어났다. 편집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고급 서체가 늘어났고 서체가 곧 편집 디자인에서 중심이 됐다. 주요 신문사들이 고유 서체를 만들어 썼고, 대기업에서도 전용서체를 만들어 썼다.

서체가 곧 아이덴티티가 되었고, 서체개발회사 주가가 수직 상승했다. 최근에는 독특한 손글씨(캘리그라피)도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

이제는 편집용 서체가 너무 많아졌다.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서체도 많다. 이제 서체를 개발하는 회사들은 범용 서체 개발에 이어 대기업 등을 상대로 전용서체를 개발하는 쪽으로 시장을 확대했다.

언제부턴가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전용서체를 만드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서체를 개발하는 일은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또, 전용서체로서 기능을 하려면 최소한 본문용과 제목용, 또 그와 어울리는 영문과 숫자까지 구색을 갖춰야 한다.

그러자면 막대한 개발비도 문제지만 기간도 오래 걸린다. 한 서체개발회사에서 모 대기업 전용서체를 만드는데 무려 7년이 걸리기도 했다. 지방자치단체에서 활용할 수 있는 범위에 비해 지나친 투자가 아닐 수 없다.

서체개발은 매우 전문적인 분야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 하고, 특히 한글 서체는 2000자 남짓이 아니라 한글이 표현할 수 있는 11,172자를 다 만들어야 한다.

한글과 영문과 숫자가 서로 어울려야 하고, 글자의 형태에 따라 달라지는 간격도 조절해야 한다. 완성도 높은 서체를 개발하기가 그만큼 어렵고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지방자치단체에서 전용서체를 개발하는 것은 과도한 낭비다. 남이 한다니까 덩달아 만드는 경향이 보인다. 남이 하는 만큼 해서 남보다 나을 수도 없는데 남만큼도 못할 거면 안하느니만 못하다.

최근 횡성군에서 ‘횡성한우체’라는 전용서체를 개발해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횡성한우체는 소뿔 이미지를 반영한 제목용 서체로 개발비 2150만원, 기간은 3개월(2021. 9. 28∼12. 26)이 걸렸다.

3개월에 뚝딱? 이 서체를 어디에 쓸 수 있을까. 난감하다. 다른 지자체의 전용서체를 검색해보았으나 대부분 활용도가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슬로건이나 사인(sign)용으로 쓸 수 있는 특정 서체를 개발하는 것이 나을 뻔했다. 편집디자이너들에게는 이런 격언이 있다. “서체의 종류를 적게 쓸수록 훌륭한 편집이다.”

편집디자이너는 하수일수록 사용하는 서체의 종류가 많다. 고수가 하는 디자인은 어지럽지 않고 단순하다. 그러면서도 눈에 쏙 들어오는 편집을 한다. 사진에서 주제와 부제가 구별되지 않으면 다 죽는 것처럼 편집도 마찬가지다.

서체가 무수히 많아지고, 선택의 폭은 훨씬 넓어졌지만 같은 책, 같은 문서에서 쓰이는 서체는 2∼3개 종류면 충분하다. 서체의 크기와 배치만으로도 얼마든지 변화와 응용이 가능하니까.

횡성군에서 매주 만드는 ‘주간업무 추진계획’이라는 문서는 간부회의용이자 언론사 배포용이다. 이 문서에 사용된 서체는 HY견고딕, HY견명, HY헤드라인M, 휴먼등근헤드라인, 맑은고딕, 맑은고딕semi, 함초롬돋움, 굴림체 등 자그마치 8종이다. 어지럽다.

관공서에서는 수많은 문서가 만들어지고 연간 발행되는 책자 종류도 엄청나다. 관공서에서 만드는 문서나 책자에 편집 전문성을 요구할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무시되면 품격이 낮아진다. 기왕에 만들 거라면 잘 만드는 게 좋다. 보기도 좋을 것이고 정보전달력도 좋아진다.

아직까지 군청에서 만드는 문서에 횡성한우체는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다. 개발비가 아깝더라도 억지로 쓰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디자인은 힘이 세다.

횡성뉴스 기자 / hsgnews@hanmail.net입력 : 2022년 0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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