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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내 마음의 보석상자 (194) 조선 임금님들의 이야기(Ⅴ)
횡성뉴스 기자 / hsgnews@hanmail.net 입력 : 2022년 0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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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원 명 횡성향교교육원장 |
| ⓒ 횡성뉴스 | 조선의 19대 환국 군주이며 소년 군주로서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고종의 비(妃) 명성왕후와 다른 인물이다.
숙종은 불같은 성격이었다. 숙종의 탕평책은 붕당정치를 척결하는 것이다. 숙종은 여당을 야당으로, 야당을 여당으로 하는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을 단행했다.
명성왕후는 조선최고의 미녀인 장희빈(장옥정)을 쫓아내고 후에 인현왕후가 왕비가 되지만 조선시대 최고의 스캔들인 기사환국으로 폐비가 되어 장희빈이 돌아와 아들을 낳았다.
숙종은 14세에 왕위에 올라 13년간 아들을 얻지 못했었다. 숙종이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원자로 삼겠다고 하자 서인의 상징인 영수 송시열이 반대하자 송시열을 제주도로 귀양을 보냈고 결국 사약을 내렸다. 66년간 조선은 서인 집안 딸이 왕비였지만 장희빈은 남인으로 왕비가 되었다.
환국의 시대 3-갑술환국과 장희빈의 최후를 살펴보자. 민가에서 이런 노래가 유행했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이라 철을 잊은 호랑나비 오락가락하니 제철 가면 어이 놀까” 미나리는 인현왕후 민씨를, 장다리는 장희빈을, 그리고 양쪽에서 왔다갔다 날아다니는 호랑나비는 숙종이었다. 숙종은 새로운 여인 무수리 최씨를 만났다.
무수리는 궁궐 최하층 천민으로 궁녀들의 옷을 빨아주는 인현왕후의 직계 몸종이었다. 무수리 최씨는 훗날 아들을 낳고 숙빈이 되며 낳은 아들이 연잉군, 나중에 조선 21대 영조 임금이 된다.
숙종은 장희빈과 멀어지고 서인들은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했고 인현왕후가 다시 왕비에 오른다. 이것이 갑술환국이다.
장희빈은 후궁 희빈이 된다. 희빈은 숙종의 총애를 되찾기 위해 인현왕후의 죽음을 바라는 저주를 내렸다.
결국 인현왕후는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난다. 결국 장희빈의 저주라고 밝혀지고 숙종은 장희빈을 사약을 내려 죽인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는 장희빈 죽음에 대해 자세한 기록이 없다. 서인에 의해 쓰인 수문록에 의하면 장희빈이 죽기 전에 세자에게 위해(危害)를 가해 병신으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20대 조선 경종은 장희빈의 아들로 태어난 비운의 임금이다. 유약한 군주로 힘이 없는 임금의 험난한 왕위 지키기가 계속된다. 14세 나이에 어머니 장희빈의 죽음을 목격하는 등 불운이 이어지고 노론의 압력속에 31년 세자의 생활을 끝내고 왕위에 오른다.
친모 장희빈은 계모인 인현왕후를 미워하고 저주하지만 경종은 극진히 인현왕후를 모셨다. 아버지 숙종은 인현왕후가 죽고 3번째 왕비 인원왕후는 16세로 경종보다 1살 많았다.
인원왕후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경종을 위협하는 이복동생 연잉군은 무수리 최씨의 소생이었다. 경종은 자녀가 없어 즉위한지 1년밖에 안되었는데 인원왕후도 연잉군을 지지하고 이복동생을 후계자로 삼으라니 경종은 난감했다.
경종은 말년에 병으로 고생하는데 연잉군이 경종에게 게장과 감을 올려 맛있게 먹고 건강이 악화되었다.
연잉군은 인삼과 부자를 처방해 마시고 경종은 세상을 떠났다. 연잉군의 경종 독살설이 팽배해졌고 결국 왕위에 오른 연잉군(영조)의 정치생활도 순탄치 못했다.
조선 21대 영조는 숙종의 아들로 어머니는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이다. 조선의 최장수 왕이자 재위 최장 기록을 세운 왕으로 약 52년간 재위하다가 83세에 승하한다.
영조는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학문에 힘쓴 군주라 신하들이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다. 영조의 탕평채는 서인(흰색) 동인(푸른색) 남인(붉은색) 북인(검은색)의 붕당을 상징하는 색을 골고루 담은 요리로 노론과 소론 서로 뭉쳐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다.
영조의 탕평책은 치우침이 없는 정치로 노론과 소론 중 온건한 사람을 등용했다. 술과의 전쟁으로 조선 최장기간 금주령을 내려 근검절약했다.
후궁인 영빈 이씨 사이에 이선 사도세자가 출생하여 한 돌 밖에 안된 아이를 세자로 책봉하여 조선시대 최연소 세자가 된다. 사도세자는 소론, 영조는 노론으로 대립되었고 성격차이도 심했다.
세자는 학문에 매진하지 않았다. 한중록에 의대증(衣帶症)으로 세자가 옷을 입으면 아버지를 만나야 하는 두려워하는 병에 걸렸다고 한다.
영조의 기대만큼 되지 못한 사도세자(당시 28세)를 영조는 뒤주에 가두어 죽인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이름 사도(思悼)는 생각할 사(思)+슬퍼할 도(悼) ‘슬픔을 생각하다’이다. |
횡성뉴스 기자 / hsgnews@hanmail.net  입력 : 2022년 0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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