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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홍 명 본지 객원 컬럼위원 |
| ⓒ 횡성뉴스 | 1636년 12월 조선은 청나라의 침공을 받는다. 침공의 명분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황제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조선이 괘씸했을 것이고, 명(明)과의 패권경쟁을 벌이고 있는 청은 조선을 신하국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갑작스런 침략에 인조는 피난처로 정했던 강화도까지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14만의 청나라 군사에 포위된다.
예조판서 김상헌(배우 김윤식)은 철저한 주전파(主戰派)로서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결사항전하자 하고, 이조판서 최명길(배우 이병헌)은 실리적 주화파(主和派)로서 항복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상헌과 최명길... 주전파와 주화파... 양쪽 모두 나라를 걱정하는 맘이야 같지만,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도 끝까지 싸우다 죽자는 쪽은 명나라에 대한 명분도 있고 멋스럽기도 하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이니 항복하자는 쪽은 실용을 택했지만 명분이야 어떠하건 멋도 없고 굴욕적이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은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임금과 신하들 간의 갈등과 함께 인간적 고뇌에 깊이 빠져든다.‘나라가 있어야 백성이 있다’하니‘백성이 있어야 나라도 있다’한다.
‘죽음은 견딜 수 없지만, 치욕은 견딜 수 있다’는 주장은 힘을 얻지 못했다.
엄동설한에 병사와 백성은 굶어 죽고, 얼어 죽고, 근왕병 동원도 실패한 상황에서 해봐야 질 것이 뻔한 전쟁을 한다.
무참한 살육이 벌어지고 결국 인조는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삼전도의 굴욕을 겪으면서 항복한다. 패전의 대가(代價)는 참혹했다.
대략 3만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비롯하여 무지막지한 공물과 함께 2명의 왕자가 인질로 잡혀가고 50만명의 백성이 포로가 되어 청나라의 노예가 되었다.
비겁하지만 적당히 타협하고 평화를 구하고자 했던 이조판서 최명길의 주장이 옳았던 것인지, 아니면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이기 보다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 했던 예조판서 김상헌이 옳았던 것인지는 아직도 논란이 있지만 명분과 의리를 앞세워 멋을 부린 대가는 참으로 가혹했다.
패권국가인 미국이 또다시 트럼프를 선택하면서 세계는 마치 100년 전 양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로 회귀한 느낌이다. 러시아는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독립했던 동유럽 국가들을 되찾으려 하고, 중국은 대만을 비롯하여 남중국해에서 끊임없이 분쟁을 일으키며,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포기하는 대신 그린란드를 삼키려 한다.
2차세계대전 후 평화로웠던 유럽은 이제 정말 심각한 전쟁의 위기를 맞이했다.
몇일 전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은 광물협정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트럼프를 만났다. 미국의 태도는 싸늘했다.
정상회담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고성이 오가는 모습이 여과없이 보여지고, 조롱하며 무시하고 젤렌스키의 복장까지 시비를 걸며 마치 잘 짜여진 TV쇼처럼 연출되었다.
약소국 대통령의 처량한 모습이 저런 것인가 할 정도로 섬뜩했다.
전쟁의 당사자인 젤렌스키는 제외한 채 푸틴과 트럼프가 우-러 전쟁의 종전협정을 맺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만난다. 6.25전쟁 당시 휴전협정에 전쟁 당사자인 우리나라가 배제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우크라이나도 러시아와의 전쟁 전 주화파와 주전파가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주화파는 변절자 또는 비겁자·간첩 등으로 몰려 해외로 추방되거나 공직에서 물러났고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으로 100만명 이상의 사상자와 파괴된 도시만 남았으며, 이에 더해 마치 식민지 시대에서 있을 법한 광물 협정까지 종용당하고 있다. 강대국 틈에 있는 약소국의 운명은 참 처량하고 가엾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가? 비록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며 군사력이 세계 6위라고는 하나 주변은 온통 깡패국가들로 득실댄다.
전쟁이란 항상 주변국가와 하기 마련이다.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행한 삼궤구고두례의 치욕과 젤렌스키가 트럼프에게 당한 모욕이 우리에게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오늘도 정치권은 연일 권력투쟁에 여념이 없다. 제국주의로 급격히 되돌아가고 있는 세계의 흐름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다. 한마디로 세상물정을 모른다. 그저 권력을 잡는 것만이 정치하는 놈들의 유일한 관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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