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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원 명 본지 객원 컬럼위원 |
| ⓒ 횡성뉴스 | 저의 가정은 자동차가 없던 시절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율동리에서 둔내면 조항리 바일로 이사를 하였다.
이사 전에 미리 조항리까지 걸어가서 조항리 주민들에게 이사에 대한 도움을 구한다.
얼마 후 율동리 주민 5명이 지게에 이삿짐을 나누어 싣고 점심으로 주먹밥을 준비하여 함께 싣는다.
아침 새벽에 출발하여 도로도 없는 산골길을 따라 몇 시간을 가다 보면 목이 마르고 힘들면 물도 마시고 잠시 지게를 내려놓고 쉰다.
오후가 지날 무렵 율동리와 목적지 조항리 바일의 중간 지점쯤에서 양쪽 마을 지게꾼 10명 만나 함께 준비한 주먹밥을 맛있게 먹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짐을 조항리 사람들에게 인계하고 율동리 사람들은 빈 지게로 돌아가고, 조항리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싣고 다시 조항리로 간다.
며칠 후 조항리 온 동네 사람들을 초대하여 집들이 마당잔치를 베푼다. 이것이 그 옛날 자동차 없던 시절의 장거리 이사 풍속도이다.
이러한 그 옛날 토속적인 이사 문화를 잘 고증하여 준비하여 전국민속예술축제에 출전하여도 좋을 것 같다.
1930년대에 갑천면 율동리 깊은 산에서 민가로 야간에 호랑이가 출몰하였다는 이야기를 선친에게서 직접 들었다.
저의 선친 현재운께서는 학교 문턱에도 못가 보시고 간신히 국문해득하시는 분이다. 오로지 농사만 짓고 평생을 사시는 분이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칠 무렵(1962년) 선친께서 서울 동대문시장에 경춘상회를 찾을 일이 있었다.
그 당시는 모든 간판이 한문으로 쓰여있어 찾지 못하고 그 주위를 계속 맴돌았다.
어느 사람이 지켜보다 하도 딱하여 “당신 어디를 찾으시오?” “아! 경춘상회를 찾습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상점을 보고도 못 찾는 지경이었다.
깨달은 바가 있어 선친은 곧바로 서울에서 집에 가지 않고 춘천 친척집으로 가서 셋방 하나와 연탄 30장을 주문하고 한 달 후에 바로 춘천으로 이사를 하셨다.
나는 일자무식이지만 외아들 하나만은 가르쳐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셨다. 춘천에서 막노동하며 저를 가르쳤는데 막노동도 기술이 없어 쫓겨나셔 장사를 하게 된다.
제천 대화 강릉 둔내 등 장터에서 약초 고추 등을 사서 버스에 싣고 춘천에 와서 파셨다.
하루는 안흥장에서 고추를 몇 자루 사서 버스에 싣고 춘천오는 길에 조수와 운임비가 끝까지 결정이 안 되자 춘천 도착하여 선친만 내려놓고 짐을 싣고 버스는 화천으로 가버렸다.
선친께서는 경찰에 신고하니 경찰은 오토바이로 버스를 따라가서 버스를 춘천으로 돌리라고 하여 춘천 와서 짐을 내려준 일이 있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또다시 안흥장에서 버스에 짐을 싣고 보니 먼저 차를 돌린 그 운전사였다. 운전사는 화가나서 짐을 내리라고 하여 내리고 그 다음 버스를 탔다.
그런데 그 악연인 운전사의 버스가 안흥 전재 길을 내려오다 굴러떨어져 수십 명이 죽고 부상당한 대형 교통사고가 발생하였다.
인간 세상 새옹지마인가? 만약 선친께서 그 버스를 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1970년대 청일면 신대리 봉복사 주변에는 복조리를 만드는 조릿대인 신우대가 많이 자랐다.
선친께서 제가 대학 재학시절 엄청난 학비를 벌기 위해 음력 12월 중하순 춘천에서 버스로 출발하여 횡성에 도착한 후 다시 갑천을 가서 청일 가는 도로 부근에서 내려 20∼30리를 엄동설한 추위에 걸어서 신대리까지 여러 번 가셨다.
복조리를 차에 가득 싣고 춘천 양구 화천 지역의 위탁상회에 복조리를 위탁했다. 소매상인들이 정월 초하루 전날 복조리를 집집마다 담 너머에 집어 던진다.
복조리는 복을 부른다고 하여 거절을 못 한다. 그렇게 겨울 장사를 하셔 그 당시 20만 원 정도 이윤을 남기셨다.
그래서 저는 대학을 마칠 수 있었다. 놀라운 일은 선친께서 장사하시면서 예를 들어 한 근에 580원인데 470근을 산다면 얼마일까? 지금은 계산기가 있지만, 옛날에는 주판이나 암산으로 하였다.
선친은 일자무식이지만 계산을 못 하면 장사를 못 한다는 생각으로 곱하기 암산을 빨리 그리고 정확히 하셨다.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로 저는 물론 계산을 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였다.
어머님께서는 그 옛날 산후조리를 못 하여 치아가 다 빠져 평생 김칫국물만 마시는 신세가 되어 저는 이를 해드려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 장학금을 받아 치과에 갔지만, 잇몸이 다 망가지고 부실하여 이를 할 수 없다고 하여 너무나 슬펐다.
세월은 흘러 1995년에 저의 모교인 춘천고등학교 영어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제가 부모님께 효도하는 지름길은 남보다 빨리 교감 교장 승진이라고 생각하여 야간 자율학습으로 밤 12시에 집에 와서 잠을 자는 바쁜 와중에도 연구를 열심히 하여 현장연구논문대회에서 전국 1등을 2회 차지하여 푸른기장증 수상을 하고 강원일보 기사에도 실리면서 40 후반에 초고속 승진으로 교감이 되었다.
저는 집에 한숨에 달려와서 “아버님, 제가 교감이 되었어요, 아버님 고생하신 덕분에 교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께서는 벌써 치매가 오셔 제 말을 전혀 듣지 못하셔 천추의 한이 되었다.
그래서 효도는 때가 있다. 그립고 자랑스러운 아버님 어머님 너무 죄송하고 면목없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편안히 영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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