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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원 명 본지 객원 컬럼위원 |
| ⓒ 횡성뉴스 | 사람들은 보통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철저하게 구분한다. 그리고 깨끗한 것은 좋아하고 더러운 것은 싫어한다. 하지만 깨끗한 것은 대개 더러운 것에서 나오고, 더러운 것은 깨끗한 것에서 나오기 때문에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의 구분은 사물의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러한 이치를 <채근담>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똥 속 벌레는 지극히 더럽다. 하지만 그 벌레가 매미로 변하여 가을철 바람을 맞으며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이슬을 마신다. 썩은 풀은 빛이 없다. 그러나 풀이 개똥벌레로 변하여 여름철 달밤에 광채를 발한다.
사람이 진실로 깨끗한 것은 항상 더러운 것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한 밝은 것은 매번 어두운 곳을 쫓아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수성찬도 목구멍을 지나 몸속으로 들어가면 변해서 냄새나는 더러운 변(便)이 된다. 그런데 냄새나는 더러운 변은 곡식을 기르는 거름이 되니 정결(貞潔)하다고 볼 수 있다.
아름다움과 추악함 또는 깨끗함과 더러움이 이와같이 바뀌게 된다. 곡식과 채소를 먹는 사람은 그 곡식과 채소를 냄새나는 더러운 변에서 생장했다고 해서 그것을 혐오해 내다 버리지 않는다.
또한 마찬가지 이치로 냄새나는 더러운 변을 보는 사람은 그 변이 진귀하고 아름답고 맛있는 음식에서 나왔다고 해서 그것을 취하지 않는다. 이것이 세상사와 인간사의 이치이다.
사람이 과거에 죄악을 저질렀다고 해도 사람이 진실로 선(善)하여 그 죄악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되고 마찬가지 이치로 진실로 악하다면 지난날 선행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취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깨끗함과 더러움이 고정되어 있거나 불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깨끗한 것이 더러운 것이 되고, 더러운 것이 깨끗한 것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 역시 겉모양이 더럽다고 해도 속마음은 깨끗할 수 있고, 겉모습은 깨끗하다고 해도 속마음은 더러울 수가 있다.
또한 보기에는 더럽고 부끄러운 일로 먹고사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지극히 깨끗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보기에는 깨끗하고 고상한 일로 먹고사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지극히 더럽게 사는 사람도 있어 천태만상이다.
불자(佛子)라면 누구나 암송하는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불구부정(不垢不淨)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는 가르침이 있다. 수행자는 단연코 싫어하고 좋아하는 경지를 넘어야 한다. 싫어하고 좋아하는 마음, 밉고 고운 마음만 없으면 저절로 탁 트여 지극한 도와 합한다는 것이다.
중생은 언제나 나 자신에 맞추어 밉고 고운 생각의 분별과 차별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나’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항상의 길을 걸어야 한다. 불교에서는 추하고 깨끗함, 귀하고 천함, 높고 낮음의 분별심, 차별심을 모두 떠나 평등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싫어하고 미워하는 혐오(嫌惡)문제가 심각하다. 혐오의 대상은 대체로 사회적 강자보다 사회적 약자가 된다. 물론 사회적 강자도 대상이 되지만 강자는 자신을 지킬 힘과 수단이 있어 크게 피해를 받지 않지만, 사회적 약자는 그런 힘이 없어 취약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예를 들면 외국인 혐오, 인종 혐오, 장애인 혐오, 성소수자 혐오, 여성, 빈민, 난민 혐오 등 다양하다. 미움과 증오의 감정과 차별과 배척의 마음이 담겨 있다.
따라서 혐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 차원의 성찰이 필요하다. 첫째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의 성찰이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용서와 관용이다. 용서할 서(恕)자에 담긴 교훈이다. 같은 여(如)와 마음 심(心)으로 내 마음이 다른 사람의 마음과 같다. 즉 다른 사람의 입장과 같이 되어보는 마음이다.
나와 다른 남을 이해하고 인정하여 결국 나와 다른 남을 받아들이는 마음이요, 나와 다른 남을 함께 하는 한마음이다. 그렇게 되면 싫어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없어지게 된다.
좋은 곳에서 나쁜 것을, 나쁜 것에서 좋은 것을 볼 줄 알고, 더러운 것에서 깨끗한 것을 볼 줄 알고, 깨끗한 것에서 더러운 것을 볼 줄 알면 차별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