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바라본 고향마을의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여기는 ‘누구누구네 집’하며 집집마다 누가 사는지 속속들이 알고, 눈감고도 알 수 있을 만큼 골목골목도 소상히 꿰뚫지만 전체의 마을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을 것으로, 각 마을을 찾아 ‘하늘에서 내려다본 정겨운 우리 고향마을’ 사진과 함께, 마을유래 및 특성, 주산물, 현재의 주민 생활상 등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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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성뉴스 |
| 우천면 문암리(隅川面 文岩里)는 횡성읍(군청)에서 약 11.8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승용차로는 약 14분여 둔내·우천 방면으로 진행하다, 추동교차로에서 6번국도 우천 새말IC 방면으로 우회전 후 이동하다 우항2길 우항리 방면 우측도로로 달리다보면 문암리 마을이다.
문암리(이장 손상기, 64)는 120세대 235명의 주민으로 5반까지 있는 마을로 1반은 정성시(64) 반장, 2반은 권오선(73) 반장, 3반은 박춘식(66) 반장, 4반은 김영래(61) 반장, 5반은 홍달표(61) 반장, 노인회장은 변영덕(72) 회장, 새마을지도자는 김인석(53) 지도자, 부녀회장은 한만옥(62) 회장이 맡아 손상기 이장과 함께 서로 협력하고 힘을 합쳐 마을살림을 꾸려가고 있으며, 주민들 중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귀촌인이 10여 가구인 것으로 나타났다. 문암리(文岩里)는 무네미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무네미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골말, 소라니, 노적바우땀, 다락골, 버덩말, 샘소골을 병합하여 하수남리(下水南里)라 하다가 1940년에 문암리로 고쳤다.
이 마을은 거의 전 주민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가운데, 전체적인 농경지 규모는 논은 약 34만7,100㎡, 밭은 약 9만9,173㎡로 벼농사 및 포도·고추·오이 농사 등을 짓고 있으며,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전체 학생수 58여명이 다니는 배움의 전당 우천중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문암리 마을은 현재 오·폐수관 설치공사를 시행하고 있는데 올해는 50% 정도를 마칠 계획으로 나머지 구간도 하루빨리 시행되길 바라고, 귀촌인들이 새로 들어와 작은 마을이 형성된 곳은 큰길은 어느 정도 조성됐으나, 소소한 작은 길도 시급하니 빠른 시일내 조성되길 희망한다”고 손 이장은 밝혔다.
횡성군지(橫城郡誌)에 소개된 문암리 마을내 옛 지명을 살펴보면, 먼저 ‘골말’은 4반에 속하는 곳으로 골짜기에 마을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노적바우’는 배나무골에 있는 바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바위 모양이 노적을 쌓은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능골’은 자작고개 옆에 있는 골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묘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다락골’은 2반에 속하는 마을로, 논배미가 작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댕데이골’은 골말에 있는 골짜기를 가리키고, ‘막자골’은 골말에 있는 골짜기를 가리키고, ‘배나무골’은 1반에 속하는 곳으로 배나무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버덩말’은 3반에 속하는 마을로 버덩(=좀 높고 평평하며 나무는 없이 풀만 우거진 거친 들)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샘소골’은 골말에 있는 골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샘이 나서 붙여진 이름으로 ‘천수동(泉水洞)’이라고도 한다.
‘소라니’는 5반에 속하는 곳으로 △예전에 연못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 또는 △소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 또는 △지형이 소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 등 여러 설이 있다.‘오리골’은 소라니 뒤에 있는 골짜기를 가리키고, ‘자작고개’는 정안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가리키는 것으로 △개인이 길을 닦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또는 △자작자작 걸어가는 고개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 등으로 전해지고, ‘핏밭재’는 정암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일제 때 산등을 끊었을 때 피가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이 마을엔 횡성군이 배출한 대표적인 의병장인 한상렬(韓相烈) 추모비가 있는데, 한 의병장은 조선왕조가 무너져가던 1876년(고종13년) 우천면 문암리에서 태어났다.
한씨 문중은 문암들의 대부분을 소유했다고 전해질 정도의 토호로 어려서부터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하였으며, 일제에 의해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향리에서 거병하였다.
이후 경기도 지평과 홍천· 원주·평창·영월에서 무려 500여 차례 교전하여 많은 적을 사살하고 무기와 탄약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며, 1907년 10월 모고곡(毛古谷 : 서원면)에서 이인영·한갑복·민긍호 부대 등 8000여명과 연합한 진공작전에 참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에 굴욕을 겪은 일제는 횡성에 주둔한 수비대로 하여금 그의 처자를 납치해 놓고 귀순하라고 온갖 회유와 협박을 자행하지만, 오히려 그는 횡성을 급습하여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일제는 의병활동을 말살하기 위해 병력을 대거 증강하여 ‘남한대토벌작전’을 전개하니, 대부분의 의병이 패하거나 설자리를 잃고 해산하게 되자 국내에선 항일투쟁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1920년 만주로 투쟁의 무대를 옮긴다.
만주로 간 그는 대한의용부대에 합류하여 참모로 활동하다, 민족진영의 분열과 몰락을 가져온 주중청년총연맹 공산당원의 흉탄에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니,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인 터 뷰 ∥손 상 기 문암리 이장 “마을안길 포장 덜된 곳 하루속히 마무리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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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성뉴스 | 문암리 손상기 이장은 강림면 월현리 출신으로 당시 자녀들이 학교를 통학하는데 멀어 지난 1992년도에 지금의 우천면 문암리로 이사온 후 7년여 반장을 역임하고, 지난 2012년과 2013년 2년간 한차례 이장을 맡은 후 2년을 쉬곤 지난해인 2016년부터 다시 문암리 이장을 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손 이장은 고향인 강림면 월현리에 밭 3만3,058m²(1만여평)가 있어 콩과 팥 등을 재배하며 수시 왕래하며 농사를 짓고 있고, 문암리엔 1만9,835m²(6천여 평)의 논에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가족은 부인 박금자(65)씨와 2남4녀의 자녀들로 다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다.
문암리 마을도 여느 마을과 다름없이 매년 정월대보름엔 전 마을주민들이 모여 윷놀이 행사를 갖고 있으며, 부녀회(회원 15명) 주관으로 1년에 한차례씩 경로잔치를 실시하고, 삼복더위(三伏) 한여름엔 날을 잡아 복달임 행사도 갖고, 노인회(회원 65명) 아랫세대인 50∼65세 미만의 장년층에선 정월에 십시일반 회비를 갹출해 바닷가 여행을 다녀오곤 한다.
한편, 손상기 이장은 “지난 2012년 처음 이장을 맡아 마을안길 300여m를 포장한 일과, 마을안길 700여m에 아스콘포장을 실시한 일과, 그리고 지난해 5반 마을안길 500여m에 아스콘 포장 등을 추진한 일 등이 가장 기억에 남는 뿌듯한 일이었다”며 “나머지 포장이 덜된 곳도 마저 하길 희망하고, 원활한 용수 공급을 위한 수로사업도 추진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